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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2월 2일 일요일

눈을 감아도 - 3


진한 소독약 냄세가 아닌 허브향 방향제 향이 방안을 가득채운것 같다. 눈을 뜨면 하얀색 천장과 하얀색 커튼, 하얀색과 파란색이 뒤섞인 이불이 눈앞에 있었을 것이다. 아마 어제까지는. 잠에서 깬 나는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파란색 천장에 빛을 잃어버린 야광별이 눈앞에 보였다. 눈을 돌려 빛이 흘러 들어 오는 창문을 바라보자 눈부신 아침해가 방안을 드려다보고 있었다.

그래, 난 이제 환자가 아니야.

기분 좋게 몸을 일으킨 나는 기지개를 쭉펴올리며 방을 나섰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출근 준비에 이래저래 아침준비에 한참이셨고 욕실쪽에서 아버지께서는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걸어나오고 계셨다. 얼마만에 보게 되는 풍경인가, 이런 평범한 가정의 아침이 나에게는 얼마나 소중한 모습이었는가? 아침을 준비하시던 어머니가 나를 바라보셨다.

"일어났니? 아침먹어야지. 이리와서 앉아."

나는 어머니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리며 식탁 앞에 앉았다. 아버지께서는 연신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고 계셨다. 눈앞에는 어머니가 손수 만드신 아침 밥이 놓여있었다. 어머니는 밥솥에서 밥을 떠서 내 앞에 가져다 두셨고 아버지도 바로 식탁에 앉으셨다. 모두가 식탁에 앉은 모습을 바라본 나는 가슴이 괜시리 찡해졌다. 얼마만에 가족이 다모여서 아침밥을 먹는 것인지. 아버지께서 수저를 드시고 국을 떠서 입에 넣으셨다.

"국이 시원하네. 어서 먹자."

아버지의 그 한마디가 얼마나 감사한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아침을 먹고 두분다 회사로 출근 하시는 걸 마중한 다음 다시 내 방으로 들어와 침대 위에 누웠다. 멍하게 천장을 바라보다가 문득 그녀에 대한 생각이 났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둘이 함께 길을 가로수 길을 걷고 환한 그녀의 미소를 바라보며 함께 하며 느꼈던 행복이 머리 속을 누볐다.

'한번 더 만날 수 없을까?'

나는 핸드폰을 꺼내어 들고 그녀가 보낸 문자 메세지를 바라 보았다. 한참을 들고 바라보다가 핸드폰의 불빛이 꺼지자 액정에 반사되어 미소 짓고 있는 내 모습이 비춰졌다. 들고 있던 핸드폰을 옆에 내려놓고 눈을 잠시 감았을 때였다. 침대를 타고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나는 급히 핸드폰을 집어 들고 전화번호도 보지 않고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경록아! 퇴원 했으면 연락해야지. 어떻게 된 거야. 임마. 나 너 병문안 가려고 병원 갔더니 퇴원했다는 소리에 깜짝 놀랬잖아."

아쉽게도 친구인 형욱이었다.

"어, 그래."

"뭐야. 이 시큰둥한 반응은 이 형님이 오랜만에 연락했으면 무릎이라도 꿇고 받아야지."

"그래, 언제 밥 한번 먹자."

"밥은 무슨, 그건 됐고 요번에......."

 녀석은 요즘에 일하는 극단의 공연이 그 다지 잘되지 않는다고 투덜거리며 초대 할 테니 한번 놀러 오라고 전화로 난리를 떨었다. 나는 마지못해서 간다고 하고 잘지 내는지, 나중에 밥이나 한번 먹자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다시 소파에 누워서 문득 그녀의 생각을 했을 때였다.

'그래, 이런 기회가 찾기 힘들지 않은가.'

주머니에 있는 핸드폰을 급하게 열었다. 그리고 형욱이 녀석에게 갈 태니 자리나 좋은 곳으로 잡아두라는 말을 해두고 전화를 끊은 뒤 문자를 쓰기 시작하였다. 벌써부터 행복한 상상에 빠지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는 쓰던 약속을 핸드폰과 함께 접었다. 그렇다. 갑작스럽게 내가 그녀에게 집착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였다. 그녀와 만나 대화를 나눈 시간은 다 합해도 10시간도 안된다.
'행여 내가 혼자 호들갑을 떨고 있는 건 아닐지, 또는 혼자만의 기대감으로 그녀를 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자  분명하게 나를 점검할 필요를 느꼈다. 나는 흥분되었던 나의 마음을 가라앉도록 숨을 크게 쉬고 마음을 비웠다. 그리고 부엌 쪽으로 가서 냉장고 문을 열고 물 한잔을 마시려다가 오랜만에 인스턴트 커피가 마시고 싶은 마음에 꺼내던 물병을 집어넣고 주전자에 수돗물을 넣은 뒤에 가스 렌지 올린 후 불을 켰다. 식탁에 앉아서 턱을 괴고 지금부터 무엇을 할지에 대해서 생각했다.

분명 학과 공부도 시작해야 되고 앞으로의 꿈도 생각해야 되고 무엇으로 먹고 살지도 생각해야 되고 이런 저런 생각으로 그녀에 대한 나의 생각을 쫒아 내려고 하였다. 하지만 다시 찾아오는 그녀의 생각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것이 뭘까, 일은 힘들지 않을까, 노래는 어떤 종류의 노래를 좋아할까, 혹시 술이나 담배는 피지 않을까, 혈액형은 뭘까, 나랑 똑같은 혈액형인가? 라는 생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던 나를 현실로 꺼내준 건 주전자였다.

물이 증발해버린 주전자가 검게 타고 있는 것을 발견한 나는 다급하고 놀란 마음에 손잡이를 잡다가 뜨거워서 놓여버렸다. 바닥에 떨어진 주전자가 발을 찍어버리고 놀란 나는 껑충 뛰며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발을 찬물로 행구고 있었는데 무언가 심하게 타는 냄새가 나는 것이었다. 부엌으로 나가보니 떨어진 뜨거운 주전자가 장판에 불을 붙인 것이었다. 소각장에서 쓰레기 태우는 냄새 같은 냄새가 올라왔다. 나는 화장실로 들어가서 큰 바가지에 물을 퍼서 불이 슬며시 올라오는 장판을 향해 뿌렸다. 다행히 불이 작아서 금방 꺼져버렸고 일생일대의 위기를 다시 맞을 할 뻔 하였다. 장판이 타오르면서 올라온 연기가 방안을 가득 채우자 나는 베란다로 뛰어가서 창문을 재빠르게 열었다. 매캐한 연기가 방을 빠져나가기 시작하였다. 한 10분이 지났을까. 방안의 연기가 모조리 빠져나가게 되었을 때 한 숨을 내쉬며 부엌의 물기를 닦아 내었다. 떨어졌던 주전자를 다시 가스렌지 위에 올려 놓고 냉장고를 열어서 물병을 꺼내어 바로 입을 대고 벌컥 벌컥 들이켰다. 기진맥진해진 나는 그대로 침대에 누워서 눈을 감았다. 별로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지친 걸 보면 분명 아직 급하게 움직이는 것은 아직 몸에 무리가 간다는 것이겠지, 얼마나 더 회복해야 되어야 하는 걸까? 들어 눕고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주머니가 핸드폰 진동이 내몸을 흔들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힘겹게 꺼내며 쳐다보았다. 그녀였다.

'뭐하고 있어?'

그녀의 문자를 보자마자 나는 한참을 웃었다. 이걸 어떻게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될지 감도 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의 문자가 오기 전까지 상황을 생각하니 정말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만 나왔다.

'아, 그냥 집에 불이 좀 나서 껐어.'

나의 문자한통에 그녀의 걱정이 섞인 답장이 날아오는 것을 시작으로 서로 신나게 문자를 주고받았다. 그렇게 한 참 이야기하던 중에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연극을 좋아하지 않느냐고 물어보았고 그녀 또한 연극이 좋아한다는 문자에 작은 극단에서 하는 연극이 있는데 같이 보러 가지 않겠냐고 하자 그녀가 흔쾌히 승낙하였다. 문자로 대화를 마친 나는 다시 거실로 걸어 나왔다. 그녀와 자연스럽게 이야기 할 수 있게 만들어준 불장난의 흔적들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장판을 콧노래 불러가며 닦고 잘라내고 불로 타버린 장판 위에 주방용 카펫을 깔고 어떤 흔적도 없었다는 것처럼 만든 나는 기분 당장이라도 버리려고 했던 주전자에 다시 물을 붓고 가스랜지에 올리고 아까 마시지 못했던 인스턴트 커피를 생각하며 불을 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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